성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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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종은 조선의 제9대 왕으로,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69년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자성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친정 이후에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고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며 경국대전, 대전속록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고 홍문관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한편, 여진족을 몰아내 변방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재위 25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나, 말년에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이 되는 등 그림자를 남겼다. 38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며, 능은 선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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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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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성종 (成宗) |
휘 | 이혈 (李娎) |
작호 | 잘산군 (乽山君), 자을산군 (者乙山君) |
묘호 | 성종 (成宗) |
시호 |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
출생일 | 1457년 8월 19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세자궁 |
사망일 | 1495년 1월 29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능묘 | 선릉 (宣陵) |
종교 | 한국 유교 ( 성리학 ) |
통치 | |
왕조 | 이씨 |
즉위 | 1469년 12월 31일 |
퇴위 | 1495년 1월 20일 |
즉위식 | 경복궁 근정문 |
선왕 | 예종 |
후왕 | 연산군 |
섭정 | 자성대왕대비 (1469–1476)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덕종 (생부), 예종 (양부) |
어머니 | 소혜왕후 (생모), 안순왕후 (양모) |
배우자 | 공혜왕후 (1467년 결혼, 1474년 사망) 폐비 윤씨 (1476년 결혼, 1479년 폐위) 정현왕후 (1480년 결혼) |
자녀 | 연산군 중종 외 16남 12녀 (총 19남 15녀) |
기타 정보 | |
명나라 시호 | 강정 (康靖) |
2. 생애
1461년(세조 6년) 5살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고, 어머니 수빈 한씨는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며 왕위 계승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한명회의 딸 중 한 명이 자을산군과 혼인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명되었다.
1469년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3살이었고, 잘산군의 친형 월산대군은 병환 중이었으므로,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외에 장인 한명회의 의도와, 어린 왕을 통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숙주 등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하였다.[17]
13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성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섭정을 받은 7년간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1476년부터 원상제도를 폐지하고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1482년에는 임사홍을 필두로 한 훈구 세력을 좌천시키는 한편, 신진 세력을 과감하게 등용하여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474년에는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하였고,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완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조 대에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이어받은 홍문관을 설치하고,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썼다.
또한 승려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7]
성종은 가뭄이 들면 자주 수반(水飯)을 들었으나, 수반을 자주 먹는 습관은 설사로 이어졌다.[17]
재위 기간 25년 동안 선정을 베푼 성종은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세로 붕어하였다. 능은 선릉이다.
2. 1. 탄생과 성장
성종은 1457년(세조 3년) 음력 7월 30일에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소혜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경신(慶新)이고, 휘(이름)는 '''혈'''(娎)이다.[1]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침착하여 세조의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세조 때 궁궐에 벼락이 쳐 환관이 즉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형 월산대군 등은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성종은 태연히 서 있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를 보고 성종이 태조와 세종을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 칭찬했다.
하지만 성종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어머니 세자빈 한씨와 함께 궁궐 밖에서 성장하게 되었다.[1] 조부 세조는 한씨를 수빈으로 봉하고 궁궐에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한씨는 사저로 물러났다. 이때 어린 성종은 곤궁한 생활에도 불평불만이 없었고,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 점을 눈여겨보고 월산대군 대신 성종을 왕위 계승자로 선택하게 된다.
1461년(세조 6년) 5세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수빈 한씨는 꾸준히 대궐에 출입하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였고, 한명회의 딸(공혜왕후)과 자을산군을 결혼시킨다.[1] 1468년에는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명되었다.[2]
성종의 계비는 신숙주의 조카딸인 폐비 윤씨였다.
2. 2. 잠저 시절
1461년(세조 6년) 5살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다. 어머니 소혜왕후는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며 왕위 계승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한명회의 딸 중 한 명이 자을산군과 혼인하였다.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명되었다. 1469년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3살이었고, 잘산군의 친형 월산대군은 병환 중이었으므로,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외에 장인 한명회의 의도와, 어린 왕을 통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숙주 등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하였다.[17]
2. 3. 즉위 이후
성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자성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수왕후와 그의 고모이자 양모였던 인혜왕대비도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1] 1476년, 19세가 되면서 친정을 시작하였다.1474년 첫 왕비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성종은 후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윤씨는 다른 후궁들을 독살하려 하고 국왕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이는 훗날 연산군의 폭정을 불러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성종의 치세는 태종, 세종대왕, 세조가 제정한 법률을 기반으로 경제가 번영하고 성장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474년,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시행되었고, 성종은 이 법전을 개정하고 개선하는 명령을 내렸다.
성종은 왕에게 자문하는 기구이자 왕실 도서관 및 연구소 역할을 했던 홍문관을 크게 확장하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강화하여 왕실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었다. 세종대왕 이후 처음으로, 보수적인 관료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유교 학자들이 조정에 등용되었다. 성종은 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유능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통치를 효율적으로 만들었고, 그의 정책은 많은 긍정적인 혁신을 가져와 지지자들이 늘었다.[3]
성종은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으며, 개방적인 학자들과 정치의 세부 사항에 대해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지리, 사회 예절, 일반 백성에게 유익한 지식 분야에 대한 책들의 출판을 장려했다.[3]
성종 시대에는 재혼 금지령(1477년)이 제정되어 재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했고, 그들의 아들은 공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4] 1489년, 왕실 친족 여성인 이구지가 과부가 된 후 노비와 동거한 사실이 발각되어 성종의 명령으로 자살했고 가족 기록에서 삭제되었다.[5]
1491년, 성종은 여진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허종 장군이 이끈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올적합이 이끄는 여진족은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했다.[7]
2. 3. 1. 수렴 청정 기간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1]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에,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2. 3. 2. 친정 시작과 사림파 등용
1476년(성종 7년) 자성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1]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계열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고하여,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482년에는 폐비 윤씨를 지지했던 임사홍을 필두로 한 훈구 세력을 좌천시키는 한편, 신진 세력을 과감하게 등용하여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2. 3. 3. 생부 의경세자 추존
1475년 (을미년) 회간대왕(의경세자, 성종의 생부)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을 두고 조정에서 성종의 아버지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18][19]정창손, 정인지를 비롯한 대신들은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게 된다면 왕실의 계통(대종)에서 아버지가 두 분인 것과 같고, 예경(禮經)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라며 반대하였다.[18][19] 그러나 대왕대비 윤씨는 "의경세자는 명(命)을 받아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으며, 또 원래는 대종(大宗)이고, 예종이 비록 명을 받아 왕이 되었더라도 먼저 신하의 예를 의경세자에게 하였거늘, 하물며 의경세자는 예종의 친형이니, 예종의 위에 둔들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반박하였다.[20]
배맹달, 임수겸, 홍경손, 권윤 등의 대신들도 대왕대비 윤씨의 의견에 동조하여 "의경세자는 세조 때에 이미 세자(世子)로 봉해졌으므로 안으로는 계승(繼承)한 바가 있고, 명나라 황제가 특히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으므로 위로도 주품(奏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의경세자의 친자(親子)로서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거들었다.[20]
이후 조정의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성종은 확고한 의지로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라는 절차 준비 명을 예조에 내렸고, 반대파 대신들의 상소가 잇따랐다.[21][22] 결국 1476년 1월 9일에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안치함으로써 성종이 예종의 법자가 아닌, 덕종(의경세자)의 친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을 확인하였다.[23]
2. 3. 4. 폐비 윤씨 폐출과 사사
윤씨는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후궁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윤씨는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자 질투심을 드러내고 독약인 비상이 발각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24]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분노하여 윤씨의 투기를 계속 지적하였고, 원로 훈신들은 윤씨를 계속 탄핵하였다. 결국 1479년 윤씨는 왕비에서 폐출되어 사저로 내쫓겼다. 그 뒤 양사의 언관들이 폐비를 사사해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자 성종은 원자의 생모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양사의 거듭된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1482년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2. 3. 5. 문화 정책과 업적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로 불릴 만큼 문화 발전이 두드러졌다. 1474년(성종 5년)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이를 보충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1]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문신 중 뛰어난 인물을 뽑아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썼다.[1] 홍문관은 왕에게 자문하고 왕실 도서관 및 연구소 역할도 했다.[3]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하여 신진세력을 키우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는데, 이는 훗날 선조 때 사림정치 완성으로 이어진다.[1] 성종은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유능한 관리를 뽑아 통치를 효율적으로 했고, 긍정적인 혁신을 많이 이루어 지지자들이 늘었다.[3]
또한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히 실천했다.[1] 성종 재위 기간에는 새로운 사찰 건립과 승려 임명도 금지되었다.[3]
성종은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으며, 학자들과 정치에 대해 논쟁하기를 좋아했다.[3] 그는 지리, 사회 예절, 일반 백성에게 유익한 지식 분야에 대한 책들의 출판을 장려했다.[3]
2. 3. 6. 대외 관계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을 시켜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허종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했으며, 이듬해에는 이계동을 함길도 일대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1]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올적합이 이끄는 여진족은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했다.[7]2. 4. 최후
성종은 1494년 가을부터 폐결핵과 천식 등의 폐병, 기허증, 서증(일종의 더위 먹은 병), 두통 등으로 병석에 누웠고, 등창까지 생겼다.[25]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겨 급격히 악화되었다. 승하 직전 대사면령을 내렸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성종은 1495년 양력 1월 20일 (1494년 음력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폐결핵과 천식 등의 폐병 합병증과 두통, 기허증, 서증, 등창, 피부종기 등의 후유증으로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선릉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2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2. 5. 사후
묘호는 조선의 모든 법제와 정비를 완성시켰다는 뜻을 담은 '''성종(成宗)'''으로 정해졌다. 빈청에서는 성종의 덕을 표현하려면 인종(仁宗)으로 정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성종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임사홍에 의해 이 사실이 거론되었고, 친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안 연산군은 분노하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 등을 죽이고,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을 대량 학살했다. 사림파는 이때의 성종 유언을 지적하며 폐비 윤씨의 추숭을 적극 반대했고, 이는 연산군 폭정의 한 원인이 되었다.[1]
3. 가족 관계
성종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손자이며,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월산대군과 누이 명숙공주가 있었다. 예종이 아들 제안대군을 두고 있었음에도,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1]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은 대군으로 책봉되고 좌리공신에 임명되었다.
성종은 한명회의 막내딸 공혜왕후 한씨와 혼인하였다.[1] 공혜왕후의 언니는 예종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였다. 성종은 생부 덕종과 생모 인수왕후를 추존하였다.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세조 | 1417년 | 1468년 | 조선 제7대 왕 |
조모 | 정희왕후 윤씨 | 1418년 | 1483년 | |
생부 | 의경세자(덕종) | 1438년 | 1457년 | |
생모 | 소혜왕후 한씨 | 1437년 | 1504년 | |
법부(양부) | 예종 | 1450년 | 1469년 | 조선 제8대 왕 |
법모(양모) | 안순왕후 한씨 | 1445년 | 1499년 | |
형 | 월산대군 | 1454년 | 1488년 | |
누이 | 명숙공주 | ? | ? |
3. 1. 왕비
시호 | 본관 | 이름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정비 | 공혜왕후 한씨 | 청주 | 송이 | 1456년 - 1474년 | 상당부원군 한명회 황려부부인 민씨 | 예종 비 장순왕후의 동생 |
제1계비 | 폐제헌왕후 윤씨 | 함안 | 1455년 - 1482년 | 윤기견 고령 신씨 | ||
제2계비 | 정현왕후 윤씨 자순왕대비 | 파평 | 창년[30] | 1462년 - 1530년 | 영원부원군 윤호 연안부부인 전씨 |
3. 2. 후궁
작호 | 본관 | 이름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귀인 | 엄씨 | 영월 | 은소사[32] | ? ~ 1504년 | 엄산수 홍씨 |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망[31] |
귀인 | 정씨 | 초계 | 금이[32] | ? ~ 1504년 | 정인석 미상 |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망[33] |
귀인 | 권씨 | 안동 | 1471년 ~ 1500년 | 권수 한씨 | ||
귀인 | 남씨 | 의령 | ? | 남흔 이씨[34] | ||
소의 | 이씨 | 미상 | ? | 미상 | ||
숙의 | 홍씨 | 남양 | 1457년 ~ 1510년 | 홍일동 문씨 | ||
숙의 | 하씨 | 진주 | ? | 미상 | ||
숙의 | 정씨 | 미상 | ? | 미상 | ||
숙용 | 심씨 | 청송 | 1465년 ~ 1515년 | 심말동[35] 이씨 | ||
숙용 | 권씨 | 미상 | ? | 미상 | ||
숙원 | 윤씨 | 미상 | ? ~ 1533년[36] | 미상 |
4. 평가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조선의 왕통에서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된다.
반발 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1476년(성종 7년)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원로 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또한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하였다.
4. 1. 긍정적 평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성종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법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 1474년(성종 5년)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이 편찬되었다.[25]또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학문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1]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25]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적 균형을 이루려 노력했다.[25]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했다.[25]
더불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을 안정시켜 백성들의 삶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25]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였다.[25]
4. 2. 부정적 평가
성종은 태종 때 내려진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반포하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하게 한다.[67] 이때부터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이는 사림파 학자들의 건의를 수용한 성종의 특명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후 김종직, 김굉필 등은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성종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임사홍에 의해 거론되었다. 친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안 연산군은 분노하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 등을 죽이는 등,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을 대량 학살했다. 사림파에서 이때의 성종 유언을 지적하며 폐비 윤씨의 추숭을 적극 반대한 것은 연산군 폭정의 한 원인이 된다.
성종 시대에 재혼 금지령(1477년)이 제정되어 재혼한 여성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낙인을 강화했고, 그들의 아들은 공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당했다.[4] 1489년, 왕실 친족 여성인 이구지가 과부가 된 후 노비와 동거한 사실이 발각되어 성종의 명령으로 자살했고 가족 기록에서 삭제되었다.[5]
성종의 재위 기간 동안 새로운 사찰 건립과 새로운 승려의 서임도 금지되었다.[3]
4. 3. 종합적 평가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조선의 왕통에서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된다.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한다.
5. 기타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다.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은 대군으로 책봉되고 좌리공신에 임명되었다. 성종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한명회와 정희왕후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신숙주, 한명회 등 원로대신들에게 국정 결정권을 맡겼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난 후, 성종은 원상 제도를 폐지하고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 견제를 위해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등용한 것을 참고하여,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5. 1. 서자 차별 강화
성종은 태종 때 내려진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경국대전에 수록하였다.[67] 이때부터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1471년(성종 2년)에 반포, 실시된 경국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이는 사림파 학자들의 건의를 수용한 성종의 특명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후 김종직, 김굉필 등은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 2. 폐비 윤씨 문제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을 공론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다.[1] 그러나 아들 세자 융은 사림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유지를 깨고,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재조사한다.[1]6. 성종이 등장하는 작품
구분 | 작품명 | 배역 |
---|---|---|
영화 | 어우동 (1985년) | 윤순홍 |
영화 | 연산일기 (1988년) | 윤양하 |
드라마 | 장녹수 (1995년, KBS) | 현석 |
드라마 | 왕과 비 (1998년~2000년, KBS) | 이진우 |
드라마 | 왕과 나 (2007년~2008년, SBS) | 고주원, 유승호 |
드라마 | 인수대비 (2011년~2012년, JTBC) | 백성현, 최원홍 |
드라마 | 역적 (2017년, MBC) | 최무성 |
드라마 | 7일의 왕비 (2017년, KBS2) | 김정학 |
드라마 | 조선변호사 (2023년, MBC) | 송건희 |
6. 1. 드라마
- 1972년 TBC 드라마 《사모곡》 (배우: 이묵원)
- 1984년~1985년 MBC 드라마 《설중매》 (배우: 길용우)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 (배우: 박진성)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 (배우: 현석)
- 1998년~2000년 KBS 드라마 《왕과 비》 (배우: 이진우)
- 2007년~2008년 SBS 드라마 《왕과 나》 (배우: 고주원, 유승호)
- 2011년~2012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 (배우: 백성현, 최원홍)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배우: 최무성)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 (배우: 김정학)
6. 2. 영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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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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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성종실록
1476-01-09
[24]
기타
윤호의 딸
[25]
기타
연산군에 의해 사살된 사슴 두 마리
[26]
서적
폐비를 제헌왕후로 추증하는 교서
연산군일기
1504-03-25
[27]
기타
중종반정 후 삭탈
[28]
서적
중궁 폐출의 교서
성종실록
1479-06-02
[29]
서적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사사하게 하다
성종실록
1482-08-16
[30]
서적
자순왕대비 윤씨 정보
중종실록
1530-08-23
[31]
서적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연산군일기
1504-03-20
[32]
서적
연산군일기
1504-03-28
[33]
서적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연산군일기
1504-03-20
[34]
기타
효령대군의 증손녀
[35]
기타
소헌왕후의 사촌 동생
[36]
서적
중종실록
1533-11-05
[37]
서적
성종실록
1475-05-20
[38]
서적
성종실록
147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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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
[40]
서적
연산군일기
1505-06-15
[41]
서적
중종실록
1507-10-16
[42]
서적
울진 삼달리 태실
1487-04-07
[43]
계보
[44]
서적
선원록 및 왕녀 태실 태지
[45]
서적
성종실록
1488-07-14
[46]
계보
[47]
서적
성종실록
1487-08-20
[48]
서적
성종실록
1489-11-08
[49]
서적
공신옹주 백자묘지명
[50]
계보
[51]
계보
[52]
서적
왕녀 합환아기씨 태실
[53]
서적
중종실록
1530-08-23
[54]
서적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 선릉지
[55]
서적
성종실록
1486-02-14
[56]
서적
정순옹주 태실
[57]
계보
[58]
서적
중종실록
1525-06-23
[59]
서적
왕녀 정복 태실비
[60]
서적
중종실록
1525-01-05
[61]
계보
[62]
서적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유물 일괄(보물 제1788호)
[63]
계보
[64]
서적
왕녀 승복아기씨 태실
[65]
서적
정숙옹주묘지명
[66]
계보
[67]
서적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6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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